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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둔다 (서정홍, 상추쌈)
  • 안산신문
  • 승인 2023.12.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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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나무 같은 시인이 있다. 자리 잡을 곳을 고르지 못해도 있는 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척박한 곳에 줄기를 펼치며 살아가는 시인, 서정홍이다. 씨앗이 나무가 되는 동안 시인도 강해졌다. 그의 시들도 그가 발 딛고 선 곳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큰 숲을 만들었다.
  서정홍 시인은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이 글을 써야 한다고, 그래야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더욱 존중받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란 누구나 읽고, 누구나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하느님! / 제가 쓴 시를 읽으며 / -그까짓 시, 나도 쓸 수 있겠다! /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는 / 사람이 늘어나게 하소서” (‘못난 시인의 기도 2’ 부분)
  어려운 말 따위 하나도 없다. 숨겨진 뜻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의 생각, 그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이만큼 잘 드러나는 시가 있을까. 어렵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지 않던가. 잘난 척을 하고 싶거나, 자기도 잘 모르거나. 어느 편이든 시인으로선 하수(下手)일 것이다. 그는 잘 아는 것만을 쉬운 말로 써낸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걸어온 길이 그리워서’, ‘2부 한테 보듬고 산다’, ‘3부 그래서 연둣빛 새순이 돋고’까지는 그가 잘 아는 삶에 대해서 쓰인 일기 같은 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 중 ‘어린아이처럼’은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를 보는 것만큼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 농사일 따라다녔다는 / 느릿재 할머니는 올해 여든이시다 / (중략) / 그런데 팔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 변하지 않은 게 있다 / 밭에만 가면 /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 야야, 무시 싹 올라왔다야! / 얼른 와 보거래이!” (‘어린아이처럼’ 부분)
  이렇게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캐내어 흙만을 털어내고 투박하게 내놓았다. 느릿재 할머니가 무 싹을 보고 느낀 감격은 생명의 위대함 따위를 논하지 않고도 우리에게 잘 전달된다. 시골 오일장에서 팔고 있는 막 뽑은 무처럼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고스란히. 
  그러나 ‘4부 온 집안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조금 다르다. 그림일기보다는 수기에 가까운 시들이다. 시인이 눈이 잘 안 보이는 며느리를 얻게 되고, 손자를 보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솔직하게 쓰고 있다. 처음의 걱정이 인정과 배움, 감동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감격스럽다. 실화의 힘이란 위대하다.
  “손자 ‘서로’가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 사흘 동안 농사일, 쉬기로 했다 / 산밭에 괭이질을 하다 / 지렁이 한 마리라도 찍으면 마음이 짠하니까 / 삼 주 동안 좋아하던 술도 끊기로 했다 /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 다른 사람 마음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 석 달 동안 채식을 하기로 했다 / 손자 서로가 살아갈 세상이 / 조금 더 맑아질 테니까” (‘작은 다짐’ 전문)
  ‘그대로 둔다’는 것은 내버려 둔다는 것이 아니라 간직해 둔다는 의미로 읽힌다. 굳이 바꾸지 않아도 나름의 값어치를 가진 것들을 그대로 모아 둔 것, 그것이 이 시집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시를 쓰게 된다면 시인이 바라는 세상은 아주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김현숙(혜윰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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