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고 하였으나 광복절을 맞은 지리산 노고단에는 하늘에서 별이 쏟아져 내렸다. 할매단이라고도 하는 그곳은 사위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배낭에 태극기를 꼽고 있는 젊은이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천왕봉을 가늠하며 삼삼오오 손을 맞잡고 무사 완주를 기원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지리산은 1967년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북 도가 함께 위치한 곳으로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을 종주산행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첫발을 떼어 설악산에서 그 걸음을 멈춘다. 그곳에서부터는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설악산 너머에 금강산이 있다. 금강산 구룡연 계곡에서 설악산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들은 명확하게 말했다. "이곳 너머에 설악산이 있습네다"
반세기를 훌쩍 넘어 선 지난날 우리 한민족은 이데올로기로 갈라섰고 외세에 의해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폐허로 도저히 일어 설 것 같지 않다고 했던 남쪽이 세계 12위 경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렇기까지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광부와 간호사 일을 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고 우리 모두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단한 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다른 한쪽은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餓死)에서 시름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후부터 현재까지의 우리 역사를 七顚八起 라고 하였다. 그랬다. 우리 민족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광복절을 맞아 종주를 하게 되는 이번 산행은 전남 구례군에 위치한 성삼재에서 시작하여 경남 산청군에 위치한 대원사까지 대략 40여km 이다. 돼지령, 임걸령, 전라 남·북과 경남 3개 광역지자체의 합일점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형제봉, 벽소령, 칠선봉, 영신봉, 세석, 삼신봉, 연하봉, 장터목과 제석봉 그리고 산의 최고봉 1915m 의 천왕봉. 산의 위세는 이렇듯 굽이굽이 마치 부채살처럼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지리산은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우리 한반도의 슬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말 없이 굽어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리산을 주 무대로 한 문학작품들이 수 없이 많다.
박경리의 '토지'가 광복 이전까지 우리 민족의 애환을 그렸다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한국전쟁으로 우리 한민족이 겪는 가슴 아픈 대하소설이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와 민초들의 숨결이 물씬 묻어나는 이곳에 잠시라도 나를 머물게 하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 이름 모를 들꽃이 산길 한쪽에서 이슬을 맞은 채 한들거리고 매미가 마지막 生의 순간을 남김없이 다하려는 듯 거세게 울었다. 산과 산을 이어 雲海가 사람들 넋을 놓게 하고 있다. 노고운해라 했던가.
빨치산 사령부가 있었던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노루목을 지나쳐 뱀사골에 도달하니 산골짝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발을 잡았다. 일반인이 운영하였던 뱀사골 산장은 흔적 없이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에 대피소가 휑뎅그렁하게 홀로 앉아 있었다.
턱까지 숨이 차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토끼봉에 오르니 물이 풍부한 연하천 산장이 쉬고 갈 것을 청한다. 바위와 바위가 이어진 형제봉 그리고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진을 다 빼앗는 벽소령은 벽소명월이 아니라도 친근하다. 하루의 3할을 걸었으니 제법 묵직해 진 다리가 쉬어 간다니 좋아할 것은 뻔하지 않겠는가. 라면이 채 끓기도 전에 빗줄기가 굵어졌다. 대피소 조리실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둔탁하다. 그래도 산행 도중에 소나기를 만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다리가 지쳐있으나 비좁은 자리에서 앉을 수도 없었다. 이내 주위가 환해지고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빗물이 흥건한 산길로 다시 접어들었다. 길은 미끄럽고 바위는 반질거렸다. 노고단부터 걸어 온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망바위 그리고 삐죽 솟아올라 가부좌를 틀고 산신령 시늉이라도 내고 싶은 칠선봉을 지나니 선비샘의 시원한 물줄기가 발을 잡는다. 과거보러가는 선비에게 샘물마시고 정신 차리라고 했다나 뭐랬다나 하는 우스개 소리가 피로를 풀어 주었다.
먹장구름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후드득 비가 날리고 하늘을 덮은 나뭇잎이 울었다. 나무와 나무들은 서로 껴않고 있는 듯 보였지만 가끔 흐린 하늘을 보이게 했다. 5월이었으면 화사한 선홍색 철쭉이 한들거렸을 터이지만 안개가 대피소를 가리고 있었다. 세석평전이다. 이곳에서 머물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호우주의보가 떨어졌다는 소리에 체온이 떨어진 몸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빠 엄마 손에 이끌려 다부지게 입을 다물고 있던 초등학생 녀석도, 선생님의 음식조리 솜씨에 고개를 끄덕이던 고등학생 녀석들도 앉을 만한 자리가 없이 사람들은 오늘 밤 비박을 위해 자리를 넓혀 나가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던가. "산은 선하지도 결코 악하지도 않다"고, 산은 늘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은 우리가 살면서 피하고 싶은 것이다. 눈치코치를 발동하고 온몸을 움직여 사람들은 제각각 이슬 피하는 방법을 찾았고 아예 깔판과 침낭에 몸을 의지하려 했던 사람들은 제 방법대로 그렇게 산에서 밤을 맞이하였다.
운 좋게 이슬을 피하게 된 사람들은 구령을 붙이고 제 뜻에 따라 주기를 원하는 관리공단 사람들을 멀뚱히 쳐다보며 몸을 맡기었다. 모두들 그렇게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서너 시간 눈을 붙였을까 했는데 웅성웅성 이곳을 떠나는 목소리가 들렸고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몸을 움츠리게 하였다. 지친 몸을 눕히고 잠에 빠져 버린 사람들을 밟지 않으려고 주섬주섬 배낭을 메고 일어나니 발목이 욱신거렸고 살과 살이 부딪혀 까칠해진 생채기가 아려왔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다. 내가 하지 않고 남이 해 줄 수는 있는 걸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나의 몫이다. 나는 일어섰다.
촛대봉은 안개가 잔뜩 끼어 모습이 흐릿했다. 어제 한나절 이상씩 걸은 다리들이 절뚝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 것일까. 부와 명예 아니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일까. 어쩌면 속된 것을 멀리하고 나를 찾기 위해 걷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일까. 때로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하고 싶은 것도 있다. 나태함, 아집 그리고 게으름,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은 연하봉을 지나니 生千死千 주목이 발목을 잡았다. 눈을 부릅뜬 채 곧게 죽음을 맞이한 주목을 보면 애절한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 살기 위해 몸부림 쳤던 민중들의 모습일까 아니면 염상진의 모습일까.
그렇게 시간 반을 지나 도착한 장터목에는 헬기장에서 비박을 한 사람들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나 피난민 같은 모습들에서는 생기가 흘렀다. 어쩌면 전북 함양 마천에서 오르고 경남 하동 또는 산청에서 오른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물교환을 했던 모습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사람, 백무동과 중산리로 내려가는 사람들, 아직도 침낭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사람들.
나는 세 번의 종주를 하면서 그동안 이곳에서 늘 저녁을 맞이했었고 그 시간은 늘 여유로웠다. 반야봉 너머로 넘어가는 석양,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맥의 파노라마 그리고 고단한 하루를 눕히기 위해 호롱불을 하나둘 밝히던 백무동과 중산리 사람들. 그런데 오늘은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안개가 더욱 몰려들었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고 했다. 우리는 천왕봉에 오른 다음 산청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중산리로 방향을 잡았다. 치밭목 산장을 지나 당도하게 되는 유평리 입구 계곡물이 넘칠 가능성이 있어서였다.
빨치산들이 최후를 맞이한 제석봉 그리고 하늘로 통하는 통천문, 그리고 ‘1915m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되다’ 고 써져 있는 천왕봉 비석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밀려 왔지만 무리는 금물이다.
포근하면서도 때로는 잘되라고 매질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 같은 지리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천왕봉은 말없이 천년만년 한반도를 굽이굽이 내려다 볼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기를 원한다."고 말하던 백범의 말씀이 지리산에서 울려 퍼졌다.
2008. 8. 16 지리산에서
최영석 기자 news@woorian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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