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42호선 동쪽의 신갈~안산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사이에 조선 후기 전통가옥인 ‘청문당’이 끼어 있다. 볼썽사납기 짝이 없다. 그동안 조선 후기 실학의 산실로 알려진 청문당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그나마 2000년 3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했다. 청문당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94호로 지정된 지도 17년이 흘렀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더욱 슬픈 일은 세계적인 콘텐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학자들의 의견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산시는 뒷짐만 지고 있다.

안산시는 초대 민선 시장 이후 22년이 흐르고 있지만 현재까지 어느 누구도 챙기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뻔하다. 그동안 거쳐 간 민선시장들이 눈앞의 치적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사업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22년이란 시간은 강산이 두 번 변할 수 있는 세월이다. 엄청난 시간 속에서 어느 누구의 눈길조차도 받지 못하고 있는 청문당은 어떤 곳일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상록구 부곡동에 위치한 청문당은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가 처음 건립했다.

진주유씨는 바닷가의 어염권을 기반으로 안산에서 기반을 잡아 조선 후기 기호남인 3대 가문으로 손꼽혔다. 청문당은 이후 조선 후기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문사들의 교류장소가 됐고 실학의 산실이 됐다.

청문당은 2000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되면서 2006년 전면 보수됐다. 청문당 앞에 있는 연지 동쪽에 바깥사랑채에 해당하는 연당이 있었고 서쪽에 현정, 북쪽에 우물과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찾을 수가 없다. 건축 형태는 청문당 앞마당에 ‘ㄷ’자형 사랑채가 있고 그 뒤로 ‘ㄱ’자의 안채와 ‘ㅡ’자형 아래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안방 남쪽으로 부엌 칸이 날개처럼 달려 있고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뒀다. 사랑채는 일꾼 방, 광, 대문간, 사랑방, 서고 등이 배열돼 있고 전면에 역시 툇마루가 있다. 뒤뜰은 계단식 꽃밭이 조성돼 있고 화단 한 가운데 안산시 보호수로 지정(1982)된 수령 250년 된 모과나무가 있다.

청문당은 전형적인 사대부집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음은 물론 조선시대 주거문화와 정원문화를 보여 주고 있어 경기도 고가 건축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400여년을 이어온 청문당(유명천)은 조선 후기 건축양식과 주거·정원문화 뿐만 아니라 완위각(이하곤), 월사고택(이정구), 경성당(유명현) 등과 함께 장서각을 겸한 당시 4대 사립도서관으로도 유명하다.

표암 강세황이 머물렀던 청문당은 만권당에 비치되어 있던 일 만권의 서책이 조선 후기 남인들의 학문적인 기반이 되기도 했다. 청문당은 조선 후기 시(詩)·서(書)·화(畵)의 삼절로 추앙받고 있는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태생하고 성장한 곳이기도 한다.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였던 표암 강세황의 ‘지상편도’는 청문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놓아 복원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시 청문당내 만권당의 책 목록이 없어 장서가 몇 권까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6.25 전쟁 당시 없어지고 500권 내외가 남아 있어 진주유씨 종가가 안산시에 기탁해 현재 성호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진주유씨는 청문당도 2006년 안산시에 기부 채납해 복원공사가 이뤄졌다. 청문당은 복원공사 이후 10여년이 넘도록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두 갈래 고속도로와 공장 틈바구니에서 숨도 쉴 수 없는 공간에 사실상 방치돼 왔다. 보이지 않는 장소에 묻혀 있던 청문당은 안산학연구원이 청문당의 여름을 재연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안산학연구원은 2015년 강세황의 ‘현정승집도’를 바탕으로 복날 이야기 ‘청문당의 여름’을 처음으로 재연했다. 하지만 지난해는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올해 7월 경기문화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두 번째로 ‘현정승집’을 재연했다. ‘청문당의 여름’ 첫 재연행사 당시 표암 선생의 대표적 연구학자인 변영섭 전 문화재청장은 “청문당은 그림이나 글로 보존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건물이 존재하는 세계 유일한 곳이다.

가치를 못 살리고 있어 안타깝다.”고 밝혔다. 올해 ‘청문당의 여름’ 두 번째 재연 행사에서 ‘표암 강세황과 현정승집도’ 해설을 한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안산에 조선 후기 수백 년 전 그림속의 건출물이 현존하는 청문당이 있다.

청문당은 강세황의 현정승집도가 말해준다. 현정승집도를 통해 그림과 건물, 글이 모두 남아있다.”며 좋은 콘텐츠라고 극찬했다. 정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먹는 축제를 가야금과 거문고, 노래, 바둑 등과 결합시킨 콘텐츠는 현시대의 뮤지컬과 맞먹는 콘텐츠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콘텐츠는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세계적인 콘텐츠로 떠오를 수 있는 청문당을 재정리하면 첫째, 조선시대 중기 전통가옥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둘째, 그림이나 글로 보존돼 있으면서 건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 유일한 곳이다. 셋째, 조선 후기 실학의 산실이라는 점이다. 청문당은 실학의 산실이나 저평가 돼 있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만권당, 괴석원 등의 복원이 가능하다.

청문당은 한마디로 콘텐츠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예술 역사의 아카이브다. 특히, 조선시대 4개 만권당(이하곤의 완위각(충북 진천 초평), 이정구의 월사고택(서울), 유명천의 청문당(안산), 유명현의 경성당(안산)<강준흠(1798~1833)의 독서차기에 기록> 가운데 안산에 2개가 존재했다는데 의미가 더 크다.

청문당은 문화예술도시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는 모티브다. 단기적으로는 재정비를 위한 준비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청문당 진입로부터 수리산 기슭까지 문화재구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도심관광의 지향점이 될 수도 있으므로 멀리 보면서 ‘안산청문당콘텐츠개발추진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여종승 기자>

여종승 기자  yjs499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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