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이는 정보고등학교에 다니는 학교 친구 김미라(17세)와 함께 토·일요일이면 주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토요일은 학교 끝나고 10시간, 일요일은 12시간을 일하고 한 시간당 법정 최저 시급인 2,840원에 못 미치는 2,800원을 받는다. 주말을 온전히 희생시킨 대가치고는 너무 적은 돈이었다.
그들은 둘 다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있고 평일에는 디자인 학원을 다닌다. 34만원인 학원비는 공장에 다니는 부모님과 택시운전을 하는 부모님이 각각 대주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쓸 돈이 거의 없었다. 음악CD도 사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도 사고 싶은데 생활에 쪼들리는 부모님에게 그런 돈은 달라고 하기가 괜히 민망했다. 그들이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보통가족이 문화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으로 지출하는 것에 해당하는 부분들이다. 그러니까 기초 생활비밖에 벌지 못하는 가난한 부모님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문화비를 대신 벌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꿈위해 주말이용 알바－
미라, 미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연히 이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는 안00군(19세)이 찾아왔다. 약간 긴 머리에 마르고 여성스런 느낌을 주는 친구였다. 군대식 짧은 머리를 한 소장이 “야, 그 머리 좀 어떻게 해, 짧게 잘라봐.” 핀잔을 줘도 그는 웃기만 했다. 왜 웃기만 하느냐고 물으니 “그런 말 다 귀에 담아놓으면 스트레스 받아요”한다. 그날은 한달에 두 번 쉬는 일요일이라 일이 없었다.
거의 날마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씩 일을 하고 그는 한달에 1백여만원을 받는다. 돈이 적은 것보다도, 집에 가면 텔레비전 볼 틈도 없이 씻고 바로 쓰러져 자는 것보다도 더 힘든 것은 주유와 계산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지루한 노동을 견디는 것이었다. “일은 어렵지 않은데 지겨워요. 정말 지루해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선하고 낮은 목소리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외환위기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여동생은 외가에, 저는 부산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어요. 교복도 학교에서 물려받아 입을 형편이었기 때문에 고 1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르바이트 하는 10∼20대들 중 45.5%(2004년도 인크루트 자료조사)가 생계형인 것처럼 그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집에서 자장면 배달하고, 면허를 따서 주류도 배달하고, 노가다 일도 했다. 스트레스 많이 받은 날은 ‘인생 뭐 있어. 한방에 가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래도 착실히 키워 살아보자’라는 극단적인 생각들이 왔다갔다했다. 그는 힘들 때 만났던 세살 연상인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여자친구를 그는 ‘누나’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가정으로부터도 학교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에게 ‘누나’는 따뜻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그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려면 먹고 살 수 있는 작은 가게라도 내야 하는데 1백만원 가지고 방세 내고 생활비 하고 나면 저축도 쉽지 않다. “저의 유일한 희망은…로또…죠.”
－반말하는 어른들이 싫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지만 스무살도 채 안된 그의 입에서 '유일한 희망은 로또'라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멍해진다.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쳐 그의 맑고 소박하고 작은 꿈들이 애매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밤 9시가 넘어서 미라와 미진이는 일이 다 끝났다. 미라는 주유소에 온 손님 중에 “야, 커피 좀 뽑아와라” 하면서 반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고 했다. 그런 손님 만나면 “커피에 침 뱉고 싶어져요”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주유소에서 일한다고 낮게 보지마세요”라고. 내가 갖는 가장 큰 희망은 ‘고통에 짓눌리지 않는 젊은이들의 영혼’이다.
*이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최영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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