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끈다.

삼파장, 형광등, 미등까지 모두 끈다.

달빛이 섞여 있을 수도 있는 가로등 불빛이 조금 남아 있지만 그래도 방안은 온통 어둠이다. 어둠의 복판에 희미한 등불 하나를 매단다. 서가에 꽂힌 것이 책이라는 것만 알 정도의 희미함이다. 그동안 나를 노려보던 책의 제목들이 알아 볼 수 없도록 흐려지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모든 것이 또렷하고 명백하고 분명해야하는 논리적 논술적 세상에서 이렇게나마 잠시 떠나 보니 어렴풋한 것의 아름다움이 나를 즐겁게 한다.

방안 모든 것들의 형체가 알아볼 수 없도록 무너져 무력해지고 나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 온다. 기세등등하던 것들을 어둠속에 장사지낸 무명 장수의 호연지기(浩然之氣)일까 아니면 객기(客氣)일까. 죽어 살던 기(氣)들이 살아나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가재도구들을 둘러 본다. 그러고 보니 별것도 아닌 것들이 나를 노려보았고 내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등불의 심지가 깜박거린다. 나는 저 심지를 돋울 수도 있고 심지의 불을 아예 거 버릴 수도 있다. 불은 나의 작은 입김에도 꺼질 것이다. 그러면 모든 존재들은 다시 어둠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 그렇게 큰 위력이 있었던가. 그 위력으로 나는 촛불 하나를 더 켰다, 양초의 작은 불빛이 더해지면서 방안 모든 것들의 윤곽은 조금 더 드러났지만 자기를 주장하기에는 더 많은 불빛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의 촛불을 켜지 않았고 등불도 달지 않았다. 그것은 멈추게 하고 싶은 세상의 불안함을 향해 던지는 내 무언의 경고이기도 하다.

도대체 얼마나 더 불안해져야 하는 것인가.

남이 먹다 남기고 간 음식을 다시 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식당에 가서 밥 사먹는 것도 불안하고, 멜라닌이 든 크림으로 만들어 진 건 아닌가 하여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 뽑아 마시는 것도 불안하다. 멜라닌은 요로결석이나 급성신부전증이 생길 수 있고, 심할 경우 목숨까지 잃게 될 수 있다는데 그런 유해성분은 이미 어린이들이 먹는 과자에까지 들어 간 것을 뒤늦게 알고 너도 나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불안의 그림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어린이들의 정신세계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부모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으니 소위 문방구 괴담집(怪談集)이 그것이다.

저자도 출처도 모르는 담배 갑 크기의 500원짜리 이 괴담집은 가져다 놓기가 무섭게 수 백 권씩 팔려 나가고 있다. 다락방 귀신, 빨간 마스크가 공원에서 사람을 죽이러 나온다든지 손 두 개와 눈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피리를 분다든지 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이 괴담집을 읽고 어린 이이들은 무서워서 잠을 못 잤다 하면서도 속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이들의 정서를 현저히 해치고 인성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줄 알면서도 출판물이 아닌 문구류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단속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자기 자식에게는 절대로 읽힐 수 없다는 이런 물건을 만드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이 장르문학을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심을 멍들게 하고 그 어린 것들이 잘되기만 바라는 어른들을 끝없이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돈 버는 일보다 귀한 것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세상의 가치 중에는 유형의 가치와 무형의 가치가 있다. 돈이나 집이나 땅 같은 것은 유형의 가치요 자산이지만 그 가치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무형의 가치인 성실, 정직, 신뢰, 사랑같은 것들이다. 남이 남기고 간 음식을 재탕해서 팔면 유형의 가치를 더 생산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미래를 더 받쳐 줄 무형의 가치를 잃음으로 말미암아 가까운 미래에 문을 닫는 사태가 올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남의 집 자식들에게 잔혹괴담을 팔아서 자기 아이에게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사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괴담을 읽고 잔혹해진 아이에게 끔직한 일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잖아도 ‘묻지 마 살인’ ‘묻지 마 자살’ 소식이 뻔질 낳게 들리는 불안한 세상에서 어린이들까지 잔혹괴담으로 훈련되어, 우리가 경계하고 무서워해야 할 대상으로 부상할지 모른다 생각하니 ‘문명’이니 ‘과학’이 하는 말도 ‘눈부신 발전’이니 ‘첨단’이니 하는 말도 이제는 무섭게만 들린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엄청난 죄를 낳게 될지 두려운 마음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불을 꺼 보자. 괴담집을 만들 수도 읽을 수도 없게. 그러나 너무 어두워 얼굴이 안보이거든 창문을 열고 달빛을 빌려 보자. 달이 없는 밤이거든 촛불을 켜고 앉아 보자. 호롱불이면 더 근사한 분위기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한번 아날로그로 돌아 가 보자. 지금처럼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면 돈을 좀 덜 벌어도 될 것이고 잔혹괴담같은 것을 찍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정직할 수 있고,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유익한 일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좀 덜 보고, 덜 듣고, 덜 가진 것이 그리 크게 억울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의하는 그 어떤 이와 호롱불 심지를 돋우며 밤이 맞도록 그 먼 나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잔혹하지 않아도 되고 괴담이 아니어도 되는.


/그사랑 교회 목사

최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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