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은 얼마나 좋은 말인가. 새해를 맞으며 기원하던 풍년, 씨를 뿌리며 소원하던 풍년, 그러나 풍년이 해마다 있는 것은 아니다. 풍년이 되려면 일조건, 강우량이 적절해야 하고 예상치 않은 천재지변 없어야 한다. 과연 올해가 풍년일지 아닐지 낟알을 거두어 곳간에 들일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그 풍년을 맞는 기쁨은 그래서 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슬픔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돌아 온 고향에 풍년이 들어 모두들 추수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지만 추수가 끝난 들판을 헤매며 이삭이나 주워야 했던 룻의 마음은 슬펐을 것이다. 추수하는 것을 알고 나타나 거두는 것을 뺏어가는 미디안을 피해 숨어서 탈곡하던 기드온의 마음은 슬펐을 것이다.
풍년이 들어 곳간을 더 크게 짓자고 신이 났는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을 들은 부자의 마음은 슬펐을 것이다.
그런 저런 슬픔들과 맥을 같이하며 나타나는 슬픔들이 올해도 우리 농민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을 맞긴 맞았지만 사겠다는 이가 없어 경험하는 슬픔이다. 인건비는커녕 비료값도 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출하비만 깨지는 경우를 맞아 하는 수 없어 땅을 파고 묻어야 하는 배한 알, 사과 한 알은 그들이 자식처럼 아끼며 돌보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자식 땅에 묻듯 해야 하니 그 마음이 오죽이나 슬프겠는가. 김장 전에 출하할 목적으로 재배한 배추들도 갈아엎어지고 있다. 참으로 슬픈 풍년이다. 북한에 뭘 보낸다고 나서던 사람들은 이럴 때 뭘 하고 있기에 이런 농산물 좀 사서 안 보내나 싶고, 선거 득표 리서치는 그렇게도 정확하게 해대는 관계기관들이 농산물적정량 생산 공급 리서치는 왜 이리도 못하나 싶어 슬프다.
그보다 더욱 슬프게 잘 익은 벼들을 갈아엎고 있는 농부들이 있다. 농민 500여명이 나와 트랙터 2대로 논 1천650㎡(500여평)를 갈아엎었다고 한다. 슬퍼할 기력조차 잃은 듯 그 한 옆에서 허수아비가 불에 타고 있다.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쌀 직불금’에 얽힌 배신감 때문이다.
보건복지가족부 차관의 쌀 소득 직불금 신청에서 비롯된 ‘쌀 직불금’ 정국은 부당 수령자가 28만명에 이르고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 등 사회지도층 전반에 걸쳐 편만한 떼를 이루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농민들이 슬퍼하며 하는 말을 들어 보자.
“농민 피땀 다 가져가라!”
“차라리 벼룩의 간을 내 먹어라!”
“진짜 농민 내년에도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 가짜 농민 물러가라!”
“농민 등골 빼먹는 공직자 명단 즉각 공개하고 파면하라!”
농사와 관계가 없는 사람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아~ 그렇구나! 우리나라는 땅이 있으면 그처럼 쌀 직불금이란 것까지 지급하는 명실상부한 ‘참 좋은’ 자본주의 국가로구나! ‘쌀 직불금’이란 건 쌀 생산농가의 실질수입을 보전해 주기 위해 정부가 지급하는 돈이라는데 이 돈을 마치 눈 먼 돈인 양 너도나도 달려들어 아귀처럼 뜯어갔다고 하니 어이가 없음은 물론이며 분노마저 치솟는다.”
누군가 쏟아 놓은 이 말이 우리 모두의 말일 수 밖에 없음이 슬프다.
지금은 모든 것이 풍년이다. 50년 전 만 해도 전화기, 라디오 없는 동네가 부지기수였는데 지금은 텔레비전 자동차까지 모든 것이 셀 수 없이 많다. 이 풍년의 시대에 풍년을 반납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들의 슬픔을 같이 하지 못하고, 오히려 즐기는 듯한 지도층 기득권자들이 때문에 더욱 슬프다. 결국은 다 같이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슬프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약삭빠름에서 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또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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