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서우법무법인 대표변호사>

소송에서는 무승부가 없다. 일단 걸린 소송은 반드시 결론을 내도록 되어 있다. 민사소송에서는 원고와 피고가 있다. 원고가 소송을 걸어 왔고 피고는 방어하는 입장이다. 민사소송에서도 무승부는 없다. 법원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정해야 한다. 양 당사자는 승소하기 위해 변론에 집중해야 한다. 주장과 증거를 정리해 재판장을 설득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하자. 소송에서 양쪽 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경우는 어떠한가? 이 경우에도 무승부는 없다. 법원은 어느 한쪽을 승자로, 다른 쪽을 패자로 선언해야 한다. 둘 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경우 이것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여기서 사용되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입증책임’이다. 입증책임은 핸디캡과 같은 개념이다. 둘 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경우 입증책임이 있는 쪽에 패소판결을 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민사소송에 있어 입증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일반인이 소송에 대해 깊이 알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통상 입증책임은 원고에게 있다. 그러나 소송 진행 과정에서 개개의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원고와 피고를 넘나든다. 입증책임이 없는 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승소가 예정되어 있다. 심지어 법원에 출석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다. 어쩌면 민사소송은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게임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전문가와 상담이 필요한 부분이다.
실무에서 문제되는 것은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는 상황에서, 즉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승소가 예정된 상황에서 굳이 상대방의 입증책임을 면제해 주고 내가 입증책임을 떠안는 일이다. 당사자가 직접 소송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 하고 법률전문가도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대표적인 경우가, 상대방이 증명해야 할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경우이다. 예를들어, 빌려준 돈을 갚으라는 대여자의 소송에 있어, 돈을 빌려 줬다는 사실과 변제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원고의 입증책임에 속한다. 그것을 증명하기까지 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로 소송이 끝나면 피고 승소이다. 이때 피고가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빌린 것은 맞지만 갚았다’라고 변론한다. 상대가 증명해야 할 사실을 인정하면 상대방의 입증책임은 면제된다. 여기서 ‘갚았다’라는 부분은 피고가 증명해야 한다. 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유리한 소송의 판도를 바꿔 버린 것이다. 이는 아주 간단한 예이며, 실제 소송에 있어 입증책임은 아주 복잡하게 전개된다.
입증책임을 일일이 알 수 없는 경우, 이와 같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말을 아끼면 된다. 민사소송에서 내가 한 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상대에게 유리하거나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변론에 있어서는 현명하지 않다. 가끔 나홀로 소송 하는 분들이, 내가 훨씬 말을 많이 했는데 가만 있던 상대방이 승소했다는 말을 한다.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내가 한 말이 상대를 도왔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민사소송은 유리한 말을 하는 것보다 불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민사소송 패소의 지름길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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