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1994년 개봉 작품 <길버트 그레이프>를 다시 보았다. 언제 누구와 이 영화를 보았고 줄거리가 어땠는지 다 잊었지만 두 가지는 기억했다. 하나는 레어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 배우였다는 것, 또 하나는 초고도 비만 엄마가 죽고 크레인으로 주검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되자 집을 불태운다는 것이었다.    
내가 맞게 기억한 것은 집이 불에 탄다는 거, 하나밖에 없었다. 살면서 기억이 나를 배신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저버린 적은 없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고 하나씩 펼쳐지는 에피소드를 보면서도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내 기억에 길버트네 가족은 삶의 무게에 휘청이면서도 서로를 저버리지 않는 가족이었다. 그래서 어렴풋하나마 내게 남은 느낌은 안타까움과 훈훈함이었다. 다시 보니 그 기분마저도 나를 배신하고 있었다. (아니면 세월이 가는 동안 가족을 보는 내 눈이 변한 탓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었다. 길버트의 엄마 때문이었다. 남편의 자살하자 충격으로 집에 들어앉아 초고도 비만이 될 때까지 살을 찌웠다.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녀 앞 접시에는 항상 음식이 차고 넘쳤다. 자식들의 등골을 빼먹고 자식들의 돌봄을 받는 엄마. 길버트가 지적 장애 동생을 때리고 집을 나갔다 오자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무너지고 말았을 거야”라던 엄마.
십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젊은 여성이 상담소에 와서 내게 물었다. “결혼한 내게 홀로 사는 아버지가 이것저것 요구합니다. 넉넉지도 않은데 남편 눈치가 보입니다. 아버지 부탁을 내가 거절해도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이 말을 하며 무척 주저하였다. 상담사마저 그녀의 불온한 생각을 비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엿보였다. 육십 대인 그녀의 아버지는 딸에게 에어컨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될 수 없고 한 몸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한 줄에 묶여 있으면 조그만 충격에도 같이 쓰러지고 일어서려고 할 때도 서로에게 방해된다. 부모의 삶은 부모의 것, 자식의 삶은 자식의 것. 경계를 분명히 긋고 나면 가족을 도울지 말지는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된다. 가족을 돕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가족이라 해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 지금은 어렵습니다. 나중에 형편이 되면 그때 도와드릴게요.”
오빠와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 취직해야 했던 이 땅의 누이들이 참 많았다. 그 누이들은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까? 자기가 번 돈을 자기 학비로 써도 된다는 것을 알았을까?
만약 내가 엄마였다면 나는 길버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떠나렴. 나는 어떻게든 살아볼게”
(그럼 길버트의 엄마와 동생은 누가 돌봐야 할까? 사회가 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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