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그 모임에서는 닉네임을 정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본인이 정하는 것도 사람들이 정해주는 것도 아닌 뭐라 할까, 절충적인 방식이었다. 참석자들이 특정인에 어울린다고 여기는 이름을 거론하면 그 리스트 중에서 본인이 고르는 식이었다. 내 닉네임으로 대 여섯 가지가 올라왔고 나는 그 가운데 ‘올리브’를 선택하였다. 이름을 건넨 여자는 뽀빠이의 연인, 올리브의 귀여운(?) 이미지가 나와 닮은 듯하다며 웃었다.
올리브, 상큼한 어감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 흡족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형편없는 기억력이 또 한 번의 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올리브’를 검색해 보니 내가 뽀빠이와 올리브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음이 곧 밝혀졌다. 어릴 적 그렇게 수없이 뽀빠이 만화를 보았건만 ….
상체가 역삼각형으로 발달한 브루터스는 끊임없이 음모를 꾸며 올리브를 납치한다. 그럴 때마다 부지깽이처럼 마른 올리브는 두 손을 확성기 삼아 외쳤다. ‘‘도와줘요. 뽀빠이.“ 그러면 번개처럼 그가 달려온다. 뽀빠이는 브루터스에 맞서 계속 고전하고 시금치를 먹은 후에야 비로소 괴력이 생겨 브루터스의 손아귀에서 연인을 구해낸다.
기억의 창고 후미진 구석에서 케릭터들이 하나 둘 튀어나왔다. 무엇보다 귓가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감기약 이름은 잊었어도 그 광고에서 ”감기 조심하세요“ 하고 외치던 성우의 목소리와 톤은 기억한다. 높고 끝을 길게 끄는 그 목소리. 올리브도 그렇게 외쳤다. 조금 다르게 말이다.” 도와줘요, 뽀빠~~~이“. 뽀빠이에서 중간의 ’빠‘를 아주 아주 길게 끌었다.
맙소사, 나는 이런 올리브에게 이름을 빌려왔다. 낭패였다. 대책 없이 매번 부르터스에게 납치나 당하는 허영심 많은 여자라니. 매번 뽀빠이가 구해줘야 하는 여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 수동성에 진저리가 났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을 터이지만 혼자서 늘 전전긍긍 할 거 같았다. 그리고 역시 예상대로였다. 블로그에 올린 내 글에 올리브란 이름이 달리고 댓글에서 사람들이 나를 올리브로 부를 때마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덜컥 내려앉았다. 어떻게 할까?
해결책은 간단했다. ’올리브‘라는 이름은 그대로 둔 채 그 의미만 바꾸면 되었다. 뽀빠이의 연인 ’올리브‘가 아닌 올리브 나무의 ’올리브‘로 하면 될 일이었다. 올리브는 내가 좋아하고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름이다. 올리브에 좋은 의미들을 가져다 붙이고 싶어 꽃말까지 조사했다. 평화와 번영이란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나는 득달같이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여러분, 제 이름은 올리브 나무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제 이름을 부를 때 혹시 뽀빠이의 연인, 올리브가 떠오르거든 얼른 고개를 한 번 저어 주세요. 그러면 올리브 나무, 또는 올리브 오일이 떠오르실 겁니다. 다음에 내 이름을 부를 때는 고개를 가로젓는 절차 없이 바로 올리브 나무를 떠올려 주세요. 꼭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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