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내 고향은 제주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살았어도 우리 가족이 물놀이를 가는 건 일 년에 딱 한 번이었다. 아버지가 우리 일곱 남매를 버스에 태워 삼양 바닷가로 인솔하였다. 바다에 누워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보며 살다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지 하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헤엄을 치다 보면 어느새 대학에 다니는 고모할머니의 여러 아들이 나타나 함께 놀아주었다. 삼촌들은 키가 컸고 툭하면 웃었다.
물놀이가 끝나면 우리는 고모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비질이 잘 된 올레에는 댑싸리 나무가 줄지어 있고 채송화가 피어 있었다. 고모할머니네 집은 황토색 초가로 바닥에서 지붕까지가 무척 높았다. 그 집의 삼촌들처럼 집도 키가 컸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부엌에서 국수를 삶던 고모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보며 환히 웃어 주었다.
누구에게나 오늘처럼 삶이 눅눅하고 어딘가에서 곰팡이가 피는 듯한 날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날은 장맛비처럼 흔했고 그때마다 난 삼양 바닷가와 그곳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추억의 빗자루가 어지러운 내 골목을 정갈하게 비질을 하고 댑싸리 나무와 채송화의 자취를 남겼다.
고모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고향에 갈 때마다 한 번 가야지 마음먹었지만 늘 다른 일정에 순번이 밀렸다. 그 사이에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뜨거운 여름날, 구슬땀을 흘리며 삶아 주신 국수에 단 한 번도 보답한 적이 없었는데… 그곳 삼양에 고모할머니 댁이 없었다면 형편이 넉넉지 않은 아버지가 감히 우리를 바다로 데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내 삶의 갈피에 뚜렷이 새겨진 어릴 적 그 호사로웠던 피서는 다 고모할머니 덕이었다.
얼마 전 대학을 막 졸업한 내 아이가 고모할머니 댁 둘째 삼촌을 미국에서 만났다. 이 둘째 삼촌이 삼양 바닷가에서 우리와 놀아주었던 삼촌들 가운데 있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리고 이 삼촌은 미국에서 근 40년 동안 살고 계신다. 그런데 내 딸이 이런 삼촌과 미국에서 만난 것이다. 삼양의 삼촌 하나가 미국에서 잘 산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으나 미국과 한국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내게는 먼일이었다. 그런 내가 고향 삼촌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사는 이 둘째 삼촌과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다. (삼촌은 아이가 사는 곳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가 취직을 앞두고 여러 고민을 하기에 미국 사정에 밝은 삼촌이 조그만 도움이라도 될까 싶었다. 삼촌은 느닷없는 내 요청에 흔쾌히 응해 주셨고 아이를 집으로 초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아이가 카톡에 올린 사진 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삼촌이 웃고 있었다. 낯익은 미소였다. 한쪽 눈이 살짝 찌그러지고 보조개가 패일 듯 말 듯 입가가 접히는 고모할머니 댁 남자들 특유의 미소.
삼촌의 그 미소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무슨 인연인지 그 댁 사람들은 내게 계속 베풀고만 있었다. 진작에 고모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을 걸 후회한다. 세상사 다 그렇듯 은혜를 갚는 일도 때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생각이 있다면 발 빠르게 움직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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