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비 오는 주말의 점심이었다. 어제 텃밭에서 수확한 푸성귀들로 식탁은 제법 풍성하였다. 대여섯 가지의 쌈 채소와 깻잎, 오이와 고추가 놓인 식탁에 불판을 놓고 우리는 삼겹살을 구웠다. 불판의 삼겹살 옆에 세로로 얇게 저민 가지를 올려 구웠다. 구운 가지는 고기의 육즙과 기름이 배어 아주 고소하였다. 거기에 고무되었던 탓이었을까, 남편이 느닷없이 통고추를 집어 지글거리는 삼겹살 옆에 놓았다. 고추는 좀 매운 거였다. 구우면 매운 게 없어져. 그는 구운 고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한 조각을 내게 주었다. 매울지도 몰라. 나는 경계하며 그것을 입에 넣고 입천장과 혀로 살짝 눌러 보았다. 대번에 맵싸한 기운이 입 점막을 톡 쏘았다. 얼른 뱉어버렸다. 안 맵다니까. 남편이 나무라듯 말했다. 엄마 정말 안 매워. 고기를 굽던 아들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아까 그 매운맛은 착각이었나 싶었다. 방금 뱉은 고추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 즉시 불에 덴 듯한 뜨거움이 몰려왔다. 먹지 말걸. 고추를 뱉은 다음 허겁지겁 상추를 욱여넣으며 난 후회를 했다.
비 내리는 틈을 타 베란다 창틀을 청소하였다. 쌓인 먼지가 물에 휩쓸려 나올 때까지 호스로 물을 분사하는데 다육이 화분이 걸리적거렸다. 쟁반에 놓인 다섯 개의 화분 가운데 한 곳에서만 다육이가 살아 있었다. 혼자 살아남은 다육이도 가운데가 휑하니 빈 화분의 귀퉁이에서 볼품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날 그녀에게 인사를 하지 말아야 했을까? 근처에서 볼일을 보고 인사차 들렸다가 그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는 마침 어디를 가려고 했다면서 좋은 구경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나를 붙들었다. 그녀의 차에 반강제로 실려 월피동 어딘가에 내렸더니 그녀의 말대로 좋은 구경이 있었다. 도자기를 굽는 곳으로 거기서 만든 화분에 다육이를 심어 팔고 있었다. 여기서 도자기 공예 수업을 받는 그녀는 자꾸만 내게 다육이를 사라고 권했다. 다육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것을 산다해도 잘 키울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녀는 공방 주인과 함께 집요하게 내게 다육이 구입을 권했다. 공방이었기에 도자기 가격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그랬다. 나는 그들에게 쪼이는 기분이 싫어 덜컥 화분을 사고 말았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안다. 그녀는 그날 나로서는 도무지 넘볼 수 없는 가격대의 화분을 여러 개 샀다. 그녀는 구매력이 있는 손님을 데리고 가 공방 주인에게 얼굴을 세우고 제 화분값도 좀 깎아보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억지로 데려온 것을 다육이가 알았을까. 다육이는 잘 크지 못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화분 겉에 깔린 자잘한 돌조각 밑을 파보았더니 그냥 흙이었다. 그것도 너저분한 흙이었다. 다육이 전용 마사토여야 하는데 흙이 깔려 있으니 그것들이 잘 자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난 다육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즉시 분갈이를 해 주어야 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초토화된 다육이 화분을 눈앞에서 싹 치워버리면 되는 데 화분값이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물청소를 하다 말고 혼자 속을 끓였다.
이제 와 내 등을 떠민 사람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매운 고추와 다육이를 권했어도 고추를 먹고 다육이를 사들인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고추가 맵다는 직감이 있었고 다육이를 잘 키우지 못할 거라는 예감도 있었다. 그 직관에 따라야 했다. 그러니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내 등을 떠미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알아. 그러니 그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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