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문득 우리 집에 있는 셀 수 없는 물건 중에 가장 오래된 게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것이 두 개의 커피잔 세트라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결혼 선물로 받은 찻잔의 나이는 (처음 그 잔으로 커피를 마신 때를 기준으로 하면) 대략 스물여덟이다. 찻잔과 받침 접시에는 눈부시게 흰 꽃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고 꽃잎의 가장자리와 꽃술은 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꽃잎을 제외한 공간은 그냥 비어있다. 인디고, 암청색이라고 해야 할까, 밝기가 조금 어두운 파란색이 그 여백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 흰색과 금색, 푸른 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찻잔은 하나의 예술품인 듯 기품이 있고 주위에 청량한 기운을 뿜어낸다.
그러나 난 찻잔이 뿜어내는 그 청량함을 온전히 마음에 담을 수가 없다. 그 찻잔을 내게 선물한 후배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찻잔의 나이만큼 오래전, 그 후배는 내게 남자를 구해 달라 졸랐다. 나는 친구의 지인, 그러니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남자를 그녀와 엮어 주었다.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이니 판단은 네가 해. 나는 그의 연락처를 건네며 몇 번이고 못을 박았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번갯불에 콩 볶듯, 이 말밖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남자에 대한 후배의 판단은 순식간이었다. 두 사람은 석 달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이 끝나고 따로 친구들과 기념 촬영을 할 때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신랑의 손이 자기에게 닿자 그 손을 홱 뿌리쳤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전화해 내게 신랑 욕을 했다.
우리 집 그릇장의 그 ‘있어’ 보이는 찻잔은 이런 결혼을 중매한 나에 대한 후배의 답례였다. 한 달 뒤쯤 나도 곧 혼인하였기에 그 찻잔은 내 결혼 선물이기도 했다. 이십팔 년 동안 내가 몇 번이나 이 찻잔을 사용했을까, 손가락 다섯 개 꼽을 정도? 그릇장에 모셔 둔 그 찻잔을 쉽게 꺼내 쓸 수 없었다. 아이들의 손이 닿아 부서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서지든 말든 그다지 손해 볼 것 없는 머그잔이 지천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 이유였을까? 나는 때때로 걸려 오는 그녀의 전화가 무서웠다. 그녀가 남편 욕을 하면 열렬하게 맞장구를 쳤으나 속이 편치 않았다. 통화를 마친 뒤면 알 듯 말 듯 어떤 불쾌감이 앙금처럼 가슴에 남았다. 그녀의 신랑은 그녀와 비슷한 키에 피부가 눈에 띄게 희고 맑았다. 잘 생기진 않았지만 후덕한 생김새에 어쩐지 귀티가 났다. 나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서 잠깐 고개를 끄덕인 게 다였다. 혹시…내가 그녀에게 부족한 남자를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족한 여자를 소개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 마음속에서 불온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큰아이가 일곱 살 무렵, 나는 어떤 통보도 없이 그녀의 번호를 차단하였다. 그녀의 마음이, 네가 우리를 이어줬으니 내 불행도 다 들어줘야 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밖에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줄 뒷심이 부족했다. 세끼 밥을 챙겨야 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이 둘을 키우느라 내 코만 해도 석 자였다.
그 찻잔이 눈에 띌 때마다 웃는 모습이 예쁘던 후배가 생각난다. 그녀와 내 사이는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광택이 조금 바랬을 뿐 흠집 하나 없는 찻잔은 그릇장에 얌전히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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