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사람들은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내게 책이 아주 많을 거라 짐작하지만 착각이다. 내가 가진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나는 소수의 책을 편애하는 편이다.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책, 사전처럼 곁에 두고 뒤적여야 하는 것만 남기고 주기적으로 책을 정리한다.
이 년 전이었나, 처음으로 인터넷 중고 책방에 책을 팔아 보았다. 책을 가득 넣은 박스 다섯 개를 보내 대략 11만 원 정도의 돈을 돌려받았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환급된 것에 놀랐고 인터넷 중고 책방이 일하는 방식에 조금 더 놀랐다. 책 한 권당 몇 페이지 몇째 줄에 커피 얼룩,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밑줄, 몇 페이지 몇째 줄에 메모, 이런 식으로 세세한 목록을 적어 보내왔기 때문이다. 보낸 사람이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으면 얼룩이나 메모, 오염이 있는 책은 그쪽에서 바로 폐기한다고 했다.
나는 책에 밑줄 긋는 걸 좋아한다. 메모할 가치가 있는 부분을 줄 쳐 놓았다가 나중에 타이핑을 해 독서기록장에 모아 놓기 때문이다. 인터넷 중고 책방에 책을 판 이후 이런 내 행태는 크게 달라졌다. 책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밑줄을 긋는 대신 스티커를 붙인다. 책을 다 읽은 후 타이핑을 하며 스티커를 떼면 책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렇게 스티커를 쓰는 건 나중에 책을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내 손때 묻은 책이 내 손을 떠났을 때 쉬이 사라지는 걸 막는 목적도 있다. 내가 깨끗이 사용하면 그 책은 좀 더 오래 숨을 붙일 수 있다. 중고 거래를 통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책의 생을 이어갈 수 있다. 책의 장수, 이것을 위한 일종의 사명감이 내게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절판된 책이 도서관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럴 때 나는 지인에게서 책을 빌려 복제한다. 책을 복제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이외에 책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부끄럽지만 한편으론 떳떳하기도 하다.
품 안의 책이 너무 오래된 나머지 빛이 바래고 책장이 바스라지는 경우도 있다. <신데델라 콤플렉스>라는 책이 있다. 대학 다닐 때 손에 넣은 책으로 내 딸이 읽고 손녀도 대를 이어 잃었으면 하는 마음에 40여 년을 끼고 있다. 책장이 누렇게 변해 글자가 잘 보이지 않고 곧 바스라질 거 같아 얼마 전 대학가로 가 불법을 저지르고 왔다. 그래서 지금 내게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책이 두 권 있다. 누렇게 뜬 옛 책과 제본되어 반짝거리는 책이 나란히 책장에 꽂혀있다. <자살의 이해>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틈틈이 되새겨야 할 책이라 금지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책꽂이를 보니 김준엽의 <장정 1.2>가 눈에 띈다. 이 책은 늘 있던 자리에 꽂혀있기에 무슨 책인지 판별이 되는 책이 되고 말았다. 남편이 결혼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인데 (책의 나이가 최소 40살이라는 얘기다) 아직 나는 읽지 못했다. 나는 이 책에도 곧 새 숨을 불어넣어 줄 생각이다. 지지난 주 제자들이 그의 탄생 100주년 행사를 알뜰살뜰 챙겨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쓴 책으로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것이다.
내가 새로이 생명을 준 책들이 오래 살아남아 내 손주 손녀들이 읽어줄 날을 상상한다. 제발 할머니와 취향이 비슷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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