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2년 전부터 10년 일기를 쓰고 있다. 이 일기장의 구성은 다소 특이하다. 어디를 들추든 특정 날짜가 중앙에 있고 그 아래로 10년이 세 줄씩 구획되어 있다. 한 면에 5년씩 양면을 다 사용한다. 오늘은 9월 16일이다. 난 먼저 2021년과 2022년의 기록을 읽는다. 작년 혹은 재작년 오늘에 내가 한 일을 반추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일기장의 가장 큰 덕이다.
2년 전 오늘 기록에 ‘딸이 바지 없어졌다고 난리, 아빠 옷장에서 발견’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이들의 덩치가 커지니까 옷을 세탁하고 분류할 때 누구의 것인지 헷갈려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아이들 옷이 아빠의 옷장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일도 생긴다. 오래전 일이 떠올라 혼자 소리 내어 웃었다. 옷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조건 반사처럼 떠오르는 일화였다. 아마 2031년이 되어 새 일기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매년 9.16에 난 혼자 소리 내어 웃을 것이다. 작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딸이 중학생이었을 때 아이들 사이에 빅 사이즈 옷 입기가 유행했다. 딸은 110 사이즈를 입는 아빠의 티셔츠나 점퍼를 가져다 입기도 했다.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에 ‘파묻혀’ 다녔다. 그 꼴이 좋아 보였을 리 없었다. 그래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러던 시절이었다. 어느 저녁, 퇴근한 남편이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새벽 수영을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통에 그가 무엇을 입고 나가는지 난 모른다) 남편이 마라톤이나 수영 대회에서 받아오는 티셔츠와 디자인과 질감이 비슷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게 가슴 한복판에 큼지막하게 YONEX라고 쓰여 있었다. 감색 반 팔 티셔츠였다.
“ 그 옷 어디서 났어?”
내가 물었다.
“모르는데? 서랍에 있어서 입었어.”
남편은 어리둥절 날 쳐다보았다. 어찌 된 일일까, 머릿속 회로를 바삐 헤집는 눈치였다. 바로 그 순간 주방에서 나오던 딸이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뱉고 스치듯 지나갔다.
“어? 그거 내 반(班)티인데?”
딸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추지도, 설핏 웃지도 않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아이 학급에서 단체로 만든 티를 입고 종일 돌아다닌 남편이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남편이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는 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왜 이 일화는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까? 그건 아마 딸이 보였던 그 가공할 무심함 때문이었다. 그 무심함이 이 일화를 내 장기 기억으로 자리매김한 일등 공신이었다. 바닥을 구르는 엄마와 자리에 붙박여 있는 아빠를 등지고 표표히 모습을 감추던 딸. 빅 사이즈 옷을 입고 다니던 천하무적 중학생.
그랬던 나의 딸도 먼 훗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도 중학생이 될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과연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까? 벌써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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