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아침 운동을 마치고 온 시각, 남편이 지갑을 두고 출근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바지를 살펴보라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다급해 보였다. 바지에 지갑이 있는지 없는지 그도 확신이 없는 듯했다. 어쩌면 지난밤 술자리에서나 귀갓길에 흘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 나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졌다. 옷장을 열자 아무렇게나 걸려 축 늘어진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엉덩이 쪽이 앞을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지갑이 들었음 직한 바지 뒤 춤을 쓸어보았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잠깐만. 휴대폰의 스피커폰 기능을 켜 화장대 의자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바지를 움켜쥐었다. 앞주머니 쪽에서 불룩하게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있네, 있어.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화장대 의자에 올려 두었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조금 후에 지갑을 가지고 내려오라고 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 오느냐는 내 말에 그는 ‘곧’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어딘가로 보낸 물건이 너무 커 설치할 수 없다는 배송 기사의 연락이었다. 판매 업체와 물건 교환을 상의하고 나니 이십여 분이 흘러있었다. 남편의 전화를 받으면 즉시 나갈 수 있게 지갑을 챙겨 놓아야 했다. 서둘러 화장대로 갔다. 이게 웬일일까? 의자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어디 가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지갑은 도통 나타나지 않았다. 옷장에 걸린 바지에서부터 화장대 서랍, 침대 위, 소파, 식탁, 현관을 몇 번이나 뒤졌는지 몰랐다. 없을 줄 뻔히 알면서 냉장고까지 열어 본 다음에는 누가 와서 가지고 갔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기진맥진한 나는 침대에 벌렁 몸을 던졌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너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거야? 나는 일상에서 허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으로 흔히 말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다. 원래도 허점이 많았는데 날이 갈수록 그 허점이 늘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넌 할 수 있어. 주문을 외우며 복기를 했다. 남편과 통화 후 거실에서 배송 기사의 전화를 받고 화장대로 돌아오기까지의 동선을 하나씩 되짚었다. 기억은 언제나 휴대폰이 화장대 의자에 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등받이가 없는 흰 의자에 오롯이 놓여 있던 지갑.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짙은 보라색 케이스에 담긴 휴대폰과 검은 가죽 지갑이 무척 닮아 보인다는 생각이. 어쩌면 거기 놓여 있던 건 처음부터 끝까지 휴대폰일 수도 있었다. 나는 헐레벌떡 옷장을 열어젖혔다. 지금까지 했던 몇 번의 시도와는 달리 옷걸이에서 바지를 내려 손에 들었다. 앞주머니, 거기에 지갑이 있었다. 지갑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바지에서 지갑을 꺼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몇 번이나 뒤지면서도 찾을 수 없던 것일 뿐.
더 이상 나를 믿을 수가 없겠구나, 자괴감이 들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트렁크에서 물건을 꺼내 친구 차에 실어주고 지하 주차장 계단을 오르던 때였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차 문을 제대로 잠갔을까? 친구와 한참 수다를 떤 기억만 났다. 가서 보았더니 차 트렁크가 활짝 열려 있었다. 트렁크 문이 그렇게 공중으로 높이 솟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이제 난 누구보다 나를 믿을 수가 없다. 오직 기록하고 확인하고 의심해야 한다. 이것만이 살길이다. 그래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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