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 송년회 장소인 호텔 앞은 자동차가 뒤엉켜 있었다. 꼼짝없이 늦고 말았다. 연회장에 들어섰더니 안산의 대학 동문 백여 명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주최 측에서 미리 사람들에게 참석 여부를 물어 자리 배치를 다 해놓은 상태였다. 내 자리를 찾아가는 중에 팔십 중반을 넘어선 원로 선배 두 분이 눈에 띄었다. 잠시 멈춰 간단히 안부를 여쭈었다. 두 분 가운데서도 더 나이가 많은 송 선배가 내 손을 잡으며 ‘고맙다’ 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팔십 년대 학번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어수선한 시간이 끝나고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이런 행사에서는 참가자의 비중을 고려하여 좌석이 정해지지 않는가? 그런데 나보다 두 원로 선배의 좌석이 무대에서 더 멀었다. 그것도 무대에서 봤을 때 중앙이 아니었고 입구에 가까운 구석진 곳이었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참석한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불참한다던 사람은 왔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니 좌석 배치도 호텔 입구의 자동차들처럼 뒤엉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원로 선배의 좌석 배치가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의구심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내빈 소개가 시작되었다. 사회자는 총동문회에서 온 임원에게만 잠시 발언 시간을 주었을 뿐 지역 국회 의원 선배에게도 마이크를 건네지 않았다. 내빈이라는 이들을 그냥 호명만 하고 지나쳐갔다. 나는 마이크를 건네받지 못한 이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에 몰두하며 즐거웠다. 언제 어느 곳에서도 내빈 소개를 할 때가 가장 지루하지 않던가. 사회자의 진행에 나는 내심 흡족하였다. 내빈 소개가 끝나고 다음 순서가 이어지는데 송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 기세가 조금 예사롭지 않았다. 옆자리의 선배가 조금 만류하는 듯한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느낌이었다.
건배 제의 순서가 되었다. 사회자가 송 선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송 선배가 자리를 떴다는 걸 알고 바로 두 번째로 고령인 선배를 호명하였다. 이름이 불린 선배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소개할 때 우리를 빼먹었다고 송이 화를 내다 가버렸어요.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나도 섭섭하던 참이었어요”
말머리에 대충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건배사를 제의받을 줄 모르고 무심히 앉아 있다가 마이크가 오자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원로 선배 두 분이 그 구석에서 가만히 속을 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전을 중시하는 분이라서….”
내 옆에 앉은 선배님이 중얼거렸다. 그가 생략한 말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했다. 원로 선배들이 조용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 나이가 되면 누구나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었을까?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구석에서 속을 끓이며 내 이름을 불러주길 애타게 기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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