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니<부부상담사>

내 인생에 끼어든, 그 수는 적으나 각각의 존재감만은 확실했던 악당 가운데 누가 가장 고약했을까? <제주어 마음 사전>의 한 대목을 읽다가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작가가 중학생이었을 때 교생 선생님을 만나 시인의 꿈을 꾸게 되었다는 구절이었다. 시를 향한 열정을 북돋아 준 교생이 떠나는 날 외톨이 소년은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나도 중학생이었을 때 자주 울었다. <제주어 마음 사전>의 작가와는 달리 소리 없이 울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 스트레스의 근원은 나의 담임 선생이었다. 여자 중학교의 젊디젊은 영어 선생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 그녀의 넓적한 얼굴에는 얽은 자국이 숭숭 나 있었다. 커다란 상체에 비하면 이상하게도 다리는 가늘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자신이 나온 대학을 입에 올려 자랑하기 바빴던 그녀는 ‘육지’에서 와서 그런지 돈을 밝혔다. 그녀의 아이가 돌이 되자 그녀는 반 임원들을 불러 반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요구에 응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눈에 띄게 구박하였다.
이학년이 되어서도 그녀가 내 담임이었다. 참으로 운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반장이 되었다. 그 무렵 말을 하려 해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목에서 소리를 쥐어짜야 했다. 그나마 쇳소리만 나왔다. 그리고 한밤중에 일어나 잠이 깨지 않은 채로 마당을 돌아다녔다. 몽유병 환자였던 셈이다. 나는 내가 밤에 그렇게 돌아다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세 살던 아줌마가 마당에서 나를 보고 불쑥 이렇게 묻기 전에는.
“자다 말고 왜 한밤에 돌아다니는 거야?”
담임은 내 목소리를 탓하며 반장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였다. 나는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데도 나는 부모님께 사정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부모가 그 부당함에 무릎을 꿇을 걸 알아서 그걸 피하고 싶었을까? 겉으로 크게 표를 내지는 못했으나 그때 나는 그녀에게 맞서고 싶은 마음에 활활 불타고 있었다.
몇 해 전 함께 차를 마시던 대학 동창이 놀라운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녀와 나는 중학교 일학년이었을 때 같은 반이었다. 그녀는 그 선생 댁에 큰 잔치가 열렸을 때 우리 반 아이들 몇몇이 불려갔던 걸 내게 상기시켰다.
“생각나? 그때 일하러 갔던 아이들 영어 점수 조금씩 다 올려주었잖아.”
내가 거기에서도 예외였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나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녀가 하다 하다 점수까지 조작한, 상종 못 할 악당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나를 가르쳤던 분들의 성함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 내가 그 선생의 이름을 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세상 힘없는 나는 그 선생을 벌주고 싶어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녀를 단죄하려면 내가 계속 기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가장 나종 순간까지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의 성은 박씨 이름은 춘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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