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지음, 다산책방>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감정들은 복잡하고 미묘하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이 삼국은 적과 동지 사이를 빈번히 오간 탓이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위치한 한국은 특히 격전의 무대였다. 전쟁의 피가 묻지 않은 흙이 한반도 어디에 있으랴. 주변국의 침략으로 고통 받았던 우리의 역사는 참혹했고 그래서 우리는 과거사에 대하여 첨예하게 날을 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에 누가 누구를 침탈했는가,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혔는가, 그 피해가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그 피해는 결국 사과와 보상을 받았는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때인지 모른다. 국제관계란 특히 한국과 중국, 일본처럼 서로 국경을 맞대고 오랜 시간 반목과 친교를 반복해온 나라 간의 관계란 역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결정되는 것임을. 우리 안에 수렴된 공통의 역사를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불러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이, 이 관계의 방향이 결정되기에 한중일 삼국 모두에게 지금 이 순간은 너무나 중요하다.
  때문에 한국문학에 [칼과 혀]와 같은, 원한으로 얼룩진 과거에서 일어나 새로운 화해의 미래로 향하는 소설이 등장한다는 건 과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제7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칼과 혀]는 적에서 동지로, 대립에서 합력으로 나아가는, 한중일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역사소설이다.
  1945년 만주국의 수도 신경은 한중일의 권력과 각각의 다른 꿈이 부딪히는 공간이다. [칼과 혀]의 배경은 바로 일본 관동군 사령부가 있는 신경이다. 소수민족 혈통의 요리사인 첸은 일본 관동군을 무너뜨릴 속셈으로 사령부의 요리사가 된다. 일본 사령관 오토조는 전쟁의 승패보다는 예술과 요리에 관심을 쏟는 인물이다. 첸이 만드는 독특한 음식에 푹 빠진 오토조는 첸의 독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는 대신 혀를 자르는 형벌을 내리고 계속 주방에서 요리를 하도록 만든다. 첸의 아내는 위안부였던 조선인 길순이다. 길순은 독립운동을 하는 오라비로부터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강요를 받고 오토조의 첩이 된다. 길순은 오라비의 지시대로 오토조를 죽이는 대신, 그의 혀를 깨물어 절반을 잘라버리곤 도망한다. 소련군이 신경으로 진군하고 관동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다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오토조는 그동안 모아뒀던 예술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첸은 무장운동을 하는 중국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칼과 혀] 작품 속 이야기의 큰 축은 오토조와 첸의 겨루기다. 수준 높은 요리에 목말라 있는 오토조는 첸을 경멸하고 하찮게 여기면서도 그의 요리에 길들여진다. 첸은 오토조 사령관을 처음에는 증오하다가 자신의 요리를 진심으로 먹어주는 단 하나의 존재인 그에게 차츰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깨닫는다. 중국이 일본에 투쟁하고,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는 정치 논리를 벗어나, 운명이라는 거대한 도마 위에서 우리는 같은 고통을 느끼고 극한 외로움에 사무쳐 펄떡거리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공감의 지점은 작품 속 활자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한중일 간 국제관계, 민족정서로까지 확장된다. 2020년을 살고 있는 한중일 삼국 국민들의 공감의 지점은 어디인가?
  한식 대가이자 요리연구가인 심영순 할머니는 “한 나라의 요리는 언어나 관습과 마찬가지로 그 나라 사람들의 정체성이라 말할 수 있지요. 요리 문화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고귀한 한 그릇] 책 80쪽)라고 요리와 민족성의 관계를 설명했다. 요리가 그 민족성의 발현인 것이다. 오토조가 내내 그리워하는 일본의 음식, 첸이 만들어내는 만주족의 음식, 길순이 첸에게 해주었던 선지국과 오토조에게 해준 청국장 등 [칼과 혀]는 서로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고, 다르지만 무한한 융합의 가능성을 가진 동아시아의 요리 문화를 파고든다. 서로의 요리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비슷한지, 삼국 요리 문화의 유사성과 상이성의 간극을 관찰하는 건 독자에게 무척 진기한 재미를 준다.
  저자는 [칼과 혀]에 등장하는 요리를 통해 재미 뿐 아니라 한중일 삼국이 함께 도모해야 할 ‘미래‘라는 의미까지 담아낸다. 책의 결말에 등장하는 취두부와 청국장 등 발효 음식들에 저자의 신중한 제안이 담겨있다. 우리가 땅에 묻어 발효시켜야 하는 것들, 썩은 냄새를 풍기지만 그 안에 숙성되어 새로운 에너지를 품게 해야 하는 것들이 있음을,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발효는 해묵은 과거의 원한으로부터 화해의 미래를 발견하게 만드는 놀라운 은유의 모티프다.
  개인은 역사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다. 역사라는 뿌리를 이어가며 새로운 싹을 틔우는 건 우리의 몫이다. 흙속에서 우리가 연민과 공감으로 발효되어 연대로 손을 잡는다면 동아시아의 미래는 어떨까?
  이러한 희망을 품게 하는 [칼과 혀]를 더 많은 한국인들 나아가 동아시아의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바란다.

정상미 (안산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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