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글>

  1930~40년대 천재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백석. 그러나 우리가 백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월북 작가라는 것과 잘생긴 외모, 자야 여사와의 로맨스, 그리고 내용이 미처 떠오르지 않는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정도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던 백석을 소설가 김연수가 우리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본명인 백기행으로 등장하는 백석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써내라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당의 사상에 어긋나는 문학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남은 단 하나의 세계’에는 ‘조국의 불기둥, 붉은 깃발’과 같이 그들이 조립한 단 하나의 언어가 존재할 뿐이었다. 기행의 선택은 시를 쓰는 대신 러시아문학을 번역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창작부진 작가들을 위한 자백위원회’에 회부 되고, 노동을 통한 사상 재무장 명목으로 깊은 산골인 삼수에서도 가장 외진 독골의 협동조합으로 내쫓긴다. 한때 쉴 새 없이 아름다운 시를 쏟아내던 시인 기행은 그 황폐한 땅에서 결국 시를 포기했을까.
  이야기에는 인상 깊은 몇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함흥의 한 행사에서 기행과 만난 러시아의 시인 벨라는 그에게 짧지만 단호한 메시지를 주었다.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그리고 옥심. 충성을 바친 당에 배신당하고 쫓기면서도 친구의 시 노트를 기행에게 맡기던 그녀. 옥심과 기행은 마지막 만남에서 전염병 환자가 나왔다는 이유로 불태워지는 집을 함께 바라본다. 골목 안쪽에서 활활 타오르는 집을 보며 기행은 자신의 세계도 그렇게 끝나버릴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삼수로 가는 길, 폭설로 발이 묶인 대합실에서 서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삼수의 인민학교 교원인 서희는 기행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고 천진하게 그의 시를 낭송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 순간 아주 오래 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안에 있었던’ 자신을 떠올린 기행은 쇠도끼 날이 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이후로 삼수에서 양을 돌보는 노동을 하며 지내는 기행에게 서희는 매주 아이들이 쓴 동시를 봐달라며 가지고 온다. 기행은 밤새 쓴 글을 남겨두는 것이 겁나 난롯불에 태워버리고 마는 사람이었다. 못난 자신을 기어이 믿어주는 서희 덕분에 기행은 갓 태어난 새끼 양을 지키는 밤이면 소박하고 솔직한 아이들의 시를 읽는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시인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늘 기쁘고 즐겁고 벅찬 상태’이거나 ‘그게 아니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는 조증의 상태뿐인 곳. 그에 맞춰 스스로를 속이도록 강요받았던 기행에 현재의 우리 모습이 겹쳐진다.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상은 딱 하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지치지 않는 체력, 긍정적인 마인드. 과연 시종일관 그렇게 사는 게 가능은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행은 명백히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고 실패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시를 향한 열망 사이에서 좌절하는 그의 연약함에는 알 수 없는 위로가 숨어 있다. ‘시의 할 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어쩌면 김연수 작가는 저마다의 눈보라 속에 서 있는 우리를 백석이라는 불꽃 앞으로 잠시나마 끌어당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주현 (중앙도서관 시민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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