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근원<동화작가>

12월 달력이 유난히 크게 들어온다. 세월의 무상함과 또 다른 해를 맞는 징검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대선판이 이상한 쪽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막말이 난무하고 상대방 헐뜯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대변인들의 말은 마치 하이에나가 먹잇감을 뜯어먹기라도 할 듯한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페어플레이 대선판이 아니라, 아무말 대잔치의 난장판을 보는 듯하다. 현 정부의 종전선언을 이어받겠다는 후보와 종전선언을 부정하는 대선 후보 사이에 국민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갈라치기도 이쯤 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인다.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이 어지러움 속에서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이 나왔다.
국방부가 11월 24일 “지난 9월부터 약 110일 동안 비무장지대에서 유해 발굴을 진행해 총 37점(잠정 22구)의 유해와 8,262점의 전사자 유품을 발굴했다.”라는 보도자료를 내놨다. 계급장과 구멍 뚫린 방탄모, 탄약류, 만년필, 숟가락 등의 유품 중에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백마고지 395고지 정상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 추정 유해였다. 적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자세, 그대로 발굴된 전사자 유해였다. 이 전사자의 계급은 일등병(현 이등병)이었다. 전투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년병 사진으로 유해 가슴 부위에 계급장과 만년필, 군번줄 등이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이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라는 소식이다. 국방부는 이거저거 따질 겨를 없이 유해를 빠른 기간 내에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게 국방부가 국민에게 준 실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 당시 보병 제9사단이 철원평야 북단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이다. 1952년 10월 6일 시작해서 10월 15일 끝이 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백마가 누운 듯한 형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 전투이다. 국군과 중공군이 고지를 10일 동안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 주인이 7회나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국군이 백마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도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치열한 전투 중 전투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거둔 제9사단은 후에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이 백마고지 전투를 소재로 전쟁영화 ‘고지전’이 제작 상영되기도 했다. 오래전 영화이지만, 주인공이 내뱉은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니가 진짜 지옥을 알아?” 고지전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6·25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유해 사진 한 장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이고 소중한 생명이 무수히 쓰러지는 전쟁은 왜 없어지질 않는 것인가? 전쟁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사전에서도 없어져야 할 단어이다.
현 정부의 종전선언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번지르르한 겉 포장을 풀어보면, 내용물은 우습기 그지없다. 툭하면 북한은 우리 대통령에게 ‘삶은 소대가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개성 시내에 우리 세금으로 건설된 남북 연락사무소 건물은 김여정의 말 한마디로 폭파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어업지도원이었던 공무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아직도 확실한 사과와 정부의 이해할만한 설득 발표가 없다. 북한이 미사일을 쏴댈 때마다, 다른 나라는 미사일이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미상발사체 모르쇠로 국민의 눈을 속이기만 했다. 나라의 존재는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데 있다. 이 유해 사진이 우리 국민의 고질병인 국론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디딤돌 역할을 했으면 한다. 전쟁이라는 허울 아래 억울하게 죽어간 국군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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