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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안산신문
  • 승인 2022.01.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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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 저, 문학동네

 불교 용어인 화두(話頭)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문답에 관해 의문을 일으켜 진리에 이르게 하는 문제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바틀비가 늘 말하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erfer not to.)”라는 말이 머릿속에 화두처럼 남는다.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 아니라서, 왜 그런식으로 말하고 싶어하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함의와 해석의 여지를 품게 한다. <모비딕>,<빌리 버드>와 함께 허먼 멜빌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필경사 바틀비>는 여러 철학적인 논의를 동원케 하는 어휘와 어법들로 독자를 즐겁게 하는 소설이다.
 19세기 중반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던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에서 ‘나’는 법률 사무실을 운영하는 변호사이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일이 많아진 ‘나’는 거래 관련 법률 문서를 똑같이 베껴 쓰는 업무를 하는 필경사 바틀비를 추가 고용한다. “주검같이 맥없고 침울한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놀라운 분량을 필사하며 ‘나’의 변호사 사무실에 마치 그리스도처럼 강림(advent)한다. 사흘 후 ‘나’는 으레 그렇듯 직원인 바틀비에게 서류 검증을 요청하나 깡마르고 무일푼인 그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공손히 거절한다. ‘나’는 바틀비가 유용한 사람이고 그와 잘 지냄으로써 자신은 관대한 고용주라는 양심의 달콤한 양식을 얻고자 그의 기행과 병적인 침울함에도 불구하고 동정심에 고용을 유지한다.
 내가 최초로 느꼈던 감정은 순전한 우울과 진심 어린 동정심이었다. 그러나 바틀비의 쓸쓸함이 내 상상 속에서 점점 커져갈수록, 그 만큼 바로 그 우울은 두려움으로, 그 동정심은 혐오감으로 녹아들었다. 비참함에 대한 생각이나 비참한 광경은 어느 선까지는 우리에게 가장 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 그 선을 넘어서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동시에 끔찍한 진실이다. (P. 5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지키고자 ‘나’는 바틀비의 태도를참아내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속 고용주로써 결국엔 해고한다. 이를 통해 ‘나’는 스스로 구원의 가능성을 발로 차버리며 “식사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말과 함께 죽음에 이른 바틀비에게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라는 탄식만 뱉고 만다.
 바틀비는 누군가에겐 자본주의에 대항한 노동운동가이고, 물질에 종속되어 자유롭지 못한 삶에 허무주의를 앓게 된 현대인이며, 유용함을 잃고 사회로부터 소외된 낙오자이자, 어쩌면 형제애(사랑)로 인간성 회복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절망과 재난 가득한 세상 속에 임한 차분하고 기묘했던 순교자이다.
 바틀비의 수동적 저항은 세상의 모든 일(노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기정사실화된 경직된 사회를 향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진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선택지가 있음을 간과하며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부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효율성과 생존을 위한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다수의 인간은 동정심과 자유의지를 잃어버린 채 불안과 우울에 싸우고 있다.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여되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속에서 유령 같던 바틀비를 돌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동정의 손길은 희망 없는 사회의 구원이 될 수 있다. 타인과 나를 같은 인류에 속해 있는 일부분으로 여기며 시를 남긴 존 던의 <묵상록 xvii> (p. 97)처럼 내가 존중받길 원하는 만큼 타인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서로를 돌봐야 한다.

이순옥<혜움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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