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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을 
  • 안산신문
  • 승인 2022.09.0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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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소설가>

읍내를 지나 시골집으로 가는 길에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하얗게 피기 시작하는 벼와 옥수수가 가는 곳마다 넘실댄다. 바람이 옥수수밭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옥수수는 바람의 손길에 우수수 누웠다 일어났다. 누운 옥수수가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바람과 햇빛과 옥수수밭이 하나가 되어 자연을 연주하고 있다.
 시골집은 어머니가 계시는 듯 따뜻한 햇볕이 마당 가득하다. 마당을 들어서니 ‘어이구, 우리 큰애 왔구나’ 하는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정원에서 풀을 뽑고 계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꼭 어머니같이 보였다. 넓은 마당에는 어머니 대신 아버님이 가꾼 진귀한 화초와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버님은 어머니 없는 집에서 꽃을 가꾸고 집안을 유리처럼 맑게 해놓고 계신다. 아버님의 손길은 주방도 안방도 어머니와 계실 때보다 더 정갈하게 꾸미셨다.
 직접 담그신 청국장에서는 고소하고 달큰한 장맛이 입맛을 돋우고, 여름 내내 주워서 쑨 도토리묵 무침은 쑥갓과 들기름 냄새가 향긋하게 배어 입맛이 돌았다. 평생 어머니가 차려 주는 식사만 하시던 아버님이 언제 이렇게 요리를 잘하셨든가? 아버님은 50년 전에 미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실 때 당신은 취사병이었다고 하셨다. 조리사로 근무하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농사일을 자청하셨다고 한다.
 지난겨울 60년 이상을 함께 살던 어머니를 산속의 유택에 모셔두고 시골집에 아버님 혼자 남겨 두고 오는 길에 자식들은 모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외롭고 쓸쓸함은 우리 모두의 몫이었다. 혼자 계시는 아버님이 이렇게 깨끗하고 씩씩하게 지내셔서 자식들은 한결 마음이 가볍다.
<노년에 관하여>를 쓴 키케로는 “내가 삶을 떠날 때 집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네.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은 임시로 체류할 곳이지 거주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네. 내가 이 혼잡하고 혼탁한 세상을 떠나 신과 같은 영혼들의 모임과 공동체로 출발하는 그 날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인가!”라고 했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장수 사회’에 접어든 지 꽤 됐다. 65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2026년이면 20%를 넘어설 것이라 한다. 사회는 이처럼 고령화되어가는데, 가치 있는 노년을 맞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도리어 ‘노년’을 마치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될 부정적 대상쯤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렇게도 아등바등 65년을 함께 살았던 어머니와 작별을 한 아버님, 덧없이 세월은 흘러 벌써 한 해가 되었다. 어머니가 아프실 때 전전긍긍 하던 아버님이 아니라, 담담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본다. 마당 옆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붉은 고추가 가득 태양을 바라보며 말라가고 있다. 아버님의 가을은 아직 붉고 황홀하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밤새 바람이 긋고 갔는지 주름살이 온 얼굴을 파헤치고, 반백의 머리카락들은 두피 곳곳에서 솟아나 제멋대로 뻗쳐 있음을 본다. 황혼의 나이, 좀 더 늙어버린 나의 얼굴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맞는 일은 주변의 어떤 비난과 아우성에도 흔들림 없는 자세가 필요하다. 몰골만이 아닌 마음도 추한 노인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오늘 하루도 아름답게 생각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는 노인 같은 데가 있는 젊은이를 좋아하듯이, 젊은이 같은 데가 있는 노인을 좋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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