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은 우리의 발걸음을 3년 가까이 묶어두었다. 여행 정보책의 최신판도 전부 2020년에 멈춰있었다. 결국 3년 전 출간된 오키나와 여행책 한 권과 이 책을 빌렸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생활사를 담았다더니 표지부터가 노란 망고 그림이다.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주렁주렁 열린 망고나무를 떠올리며 여행에 올랐다. 잘 몰랐기 때문에 설렐 수 있었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이란 책을 통해 알려져 있다. 전후 오키나와인들의 정체성과 피차별부락에 대해 주로 연구하는 사회학자이다. 개성적이고 다양하고 복잡한 개인의 이야기는 그의 글을 통해 거대한 사회 변동과 역사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양적 조사와 질적 조사의 간극을 부수며 이야기가 곧 역사라고 말한다. 
  책은 총 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마다 구술 청취한 실재의 이야기와 사회학적 이론이 교차한다. 각 장은 독립적인 하나의 글이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확실히 존재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시대, 혹은 특정 장소에서 우연히 태어난 사람들이 혹독한 사회적 조건과 구조적 제약 속에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힘껏 노력한 증거들이다. 
  13명의 가족이 산속에 둘러앉아 수류탄 두 개를 들고 있다. 주변에서 천황 폐한 만세를 외치고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족들도 신관을 뽑았다. 터지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도 터지지 않자 엄마는 목숨이 보물이라고 외치면서 도망치라고 했다. 수류탄 없이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순간 미군이 상륙해서 박격포 포격을 퍼부었다. 수류탄 불발로 살아남은 아버지는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 (51쪽~53쪽 구술 청취 요약)
  집단자결을 이야기하는 그녀는 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망고를 얼려오길 잘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피-스’사인을 만들었다. 1945년 그녀는 일본군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2015년 이 공민관에서 수류탄 대신 그녀가 건네준 것은 몇 개의 다디단 망고였다. (63쪽)
  읽고 나서 다시 보니 표지의 망고가 다르게 보인다. 칼집 낸 망고는 뒤표지에 그려진 수류탄의 격자무늬를 떠올리게 하고, 작은 꼭지는 신관 같기도 하다. 70년의 시간차를 둔 폭력의 증거물(수류탄)과 용서의 증거물(망고). 전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던 두 사물은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차를 뛰어넘어 연관되고, 하나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야기에서 역사를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조사했던 구술자들처럼 담담히 보고 들었던 경험을 써 내려갈 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구술자들의 시간, 저자의 시간, 그리고 읽고 있는 자신의 시간이 혼재하여 흐를 뿐이다. 현재의 이야기 안에 혼재하는 복수의 과거 그 모든 것들은 실재한다. 그것은 새롭게 이야기된다고 해서 애매해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롭게 이야기하고 되물으며 서서히 그 의미가 확정된다. (122쪽)
  어느 곳을 여행하더라도 그곳의 이야기는 존재한다. 그 이야기 안에는 반드시 뼈아픈 기억들이 있을 것이고, 그 시간을 사력을 다해 살아낸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어떤 땅이라도 예외는 없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안다면 오키나와의 망고는 달콤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것만이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알게 되면 설렘은 줄겠지만 진정한 여행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김현숙<혜윰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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