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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 안산신문
  • 승인 2023.05.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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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마음속에 담아온 염원이 해결되었다면 어떤 기분일까. 소설가 김훈은 청년 시절부터 안중근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그의 짧은 생애가 뽐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2021년 몸의 이상을 겪고 나서 더이상 미루어 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때려서 시작했다고 한다. 평생의 과업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갔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힘이 없는 세 단어를 직업으로 삼는, 힘이 없는 청년들의 이야기 김훈의 《하얼빈》이다. 역사 소설이지만 일제의 만행보다는 빛나는 청춘이 담겼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저격하기 전후 안중근의 행동과 생각이 섬세하게 묘사됐다.
  “러시아를 도모할 때까지도 이토는 그것이 도장으로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후 조선 사대부들과 자주 상종할수록 이토의 뜻은 도장 쪽으로 기울었다. (중략) 도장의 힘은 거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p17
  도장 하나로 나라의 통치권이 넘어가는 믿지 못할 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가능한 이유는 기득권이 ‘문명개화’라는 단어에 힘입어 제국주의에 복종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결정 당한다고 한다. 흔들리는 삶에 빈틈이 보이는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다가와 잠식시킨다. 아주 서서히. 알아차렸다면 늦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되돌려야 한다.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殺)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p89
  안중근은 삶을 되찾고 싶었다. 을사조약도 정미조약도 우리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힘이 없는 사람의 말을 세상에 들리게 하려면 떠들썩한 사건이 필요했을 뿐이다. 단순히 이토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론’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가진 물리력이 권총 한 자루였을 뿐이다. 이토를 죽여야 하는 이유였다.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을 쏘는 순간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p166
  이토는 안중근의 바람대로 조선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동안에도 꿋꿋했다. 자객이 아니라 의병 참모중장 자격이라는 말을 받아 들여주지 않아도 덤덤한 그에게서 당당한 청춘을 봤다. 
  이토가 사망하자 나라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서 순종은 조위금 십만 원을 냈고 이은은 안타까워했다.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역사이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나라는 외면했던 안중근의 마지막은 빌렘 신부가 함께 해주었다. 빌렘은 뮈텔 주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말을 들었고 기도해 주었다.
  소설에 담지 못한 역사적 사실은 책의 후기에 추가되었다.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의 계명을 범한 ‘죄인’으로 낙인찍힌 안중근 의사는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에 의해 ‘정당방위’로 인정받았다. 보호받지 못한 직계가족과 문중의 인물이 겪어야 했던 시련과 굴욕도 담겼다.
  ‘약육강식’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저자의 의도대로 힘없는 청년의 살과 몸이 담긴 책이다. 러시아 헌병에게 제압당할 때 뱉은 말 “코레아 후라”. ‘후라’는 ‘만세’라는 뜻이다. 저자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당당한 안중근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비록 힘든 삶 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지키라는 뜻일 듯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말은 힘든 일을 겪으면 성장한다는 뜻이다. 보람은 흘려보낸 시간이 아니라 노력한 시간이 쌓였을 때 느낀다. 지금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있다면 ‘당당한 청춘’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칼의 노래》에 비해 풍경이 없다는 질문에 “하얼빈에 가보지 못해서”라며 개정판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하니 벌써 기다려진다.

신다미<혜윰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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