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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나무의 시간
  • 안산신문
  • 승인 2023.08.23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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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희<소설가>

  새벽 5시. 여명이 밝아오는 호숫가를 걸었다. 탑정호는 워낙 넓어서 차로 돌아도 꽤 시간이 걸린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마냥 신나게 걸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위로 철새가 날아간다. 부지런한 물오리들도 고개를 처박고 아침 식사를 하는지 큰 물고기를 입에 물고 퍼덕인다. 어제저녁 노을에 취해 잠이 들고 새벽에는 싱싱한 물의 퍼덕임을 보는 황홀한 시간이다.
 탑정호는 수려한 대둔산의 물줄기를 담아내고 있다. 호수는 산과 강과 들을 품고 산다. 바다만큼이나 넓고 깊은 호수에 동이 터 오른다. 눈을 뜨기조차 어려울 만큼 강렬한 빛속에서 햇볕은 따스함과 그 눈부심으로 인간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 태양을 향해 당당히 마주 선 곳. 그곳이 탑정호이다. 호수 가운데 곳곳에 섬이 있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인을 따라 나룻배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호수 한가운데에 웅장한 버드나무가 무성한 잎을 피우고 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그 모습이 장관이다. 버드나무는 물이, 호수가 잔인하였지만, 선택을 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아름드리나무로 자랄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탑정호에서 나무는 천년을 버텼다
나무는 시간을 기억할 수 없다
깃들던 수많은 생명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이 지났다

태생지를 선택할 수 없는 운명
어느 날 이곳은 호수가 되어버렸다
봄으로 피운 청춘을 나무는 스스로 기억한다

그 여름 폭풍우와 세찬 비바람
웃고 떠들며 화려했던 시간은 보이지 않고
퇴적층의 무늬를 만드는 장담할 수 없는 미래.
-졸고 <나무의 기억>

 물속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처럼 인간도 척박한 환경에서 버티고 삶을 이어 나왔다. 사진가 김종범 씨도 탑정호 호숫가에 아담한 집을 짓고 사진만 찍으면서 지낸다. 사진 찍기는 일은 밥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호수로 들로 산으로 출사하러 다닌다. 손가락에도 관절염이 생기고 발에는 1년 내내 습진을 달고 산다.
 얼마 전에는 『제주의 무덤』이라는 사진집을 냈다. 숙명처럼 사진 찍는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다 보니 밥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탑정호에 관한 사진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사진을 보고 새벽부터 사진에 나오는 탑정호의 이미지를 찾아다녔다. 사진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어도 분위기가 다르다. 해가 뜨는 시간이 매일 다르듯이 어제의 그 사진을 똑같이 찍을 수 없다. 수천수만 장의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 탄생한다.
 나는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내가 찍고 싶은 대로 찍었다. 작품성을 기대하지 않으니 모두 명작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사진도 삶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편안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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