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훈<국민의힘 상록갑 당협위원장>

내겐 손바닥 크기의 수반이 하나 있다. 지인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 수반은 지인에게 가질 못하고 내 서재에 아직도 놓여있다.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수반이다.
그 지인과 친하게 된 특별한 인연, 산책로에서였다. 지인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함께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사회의 압축판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무뚝뚝하게 지나가는 사람, 웃으며 화답하며 가는 사람, 쑥스러운 모습으로 지나가는 사람, 마치 구면인 듯한 과장된 몸짓으로 지나가는 사람 등….
그렇게 산책길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어떤 사람일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작정하고 보온병에 커피를 타서 처음으로 산책길 쉼터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모습과는 달리 무척 수줍어하며 과묵한 편이었다.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는 모습에 더 호기심이 일었다. 그 후 몇 번을 더 만났지만, 그의 입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책길에 그의 친구가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사모님은 어떠신가?” 친구의 말에 지인은 그냥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휙 스쳐 지나갔다. 내 끈기에 그가 입을 열었다. 말기암으로 고생하는 아내, 의사의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에서 요양한다고 했다. 방문 의사를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그의 말은 단호했다. 아내가 방문객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손에 망초꽃 한 송이가 들려져 있는 게 보였다. 내 눈길이 멈추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아내의 머리맡 수반에 꽂아둔다고 했다. 화원의 꽃보다는 야생화를 더 좋아한다는 아내였다. 어쩌면 아내를 위한 마지막 꽃잔치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친분을 이어갔다.
아직도 그 무더위를 잊지 못하는, 안산을 안프리카까지 불리운 2018년 중복 무렵, 그와 함께 삼계탕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즈음 산책길에서 그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무더위 때문이려니 했던 내 생각은 빗나갔다. 봉사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고 했다. 더 긴 이야기는 그냥이란 말로 자신을 내세우길 거부하고 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정이 가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났다. 아니, 냄새가 아니라 향기였다.
그해 가을, 서울 인사동에 들를 일이 생겼다. 친척 중 한 분이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수묵화 전시회를 했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기념품 가게를 지날 때였다. 손바닥 크기의 수반을 사며 좋아라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간 그 지인의 모습이 겹쳐졌다. 작은 수반을 샀다. 돌아오는 길, 이 수반에 꽂히는 야생화처럼 지인의 아내가 병마를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길 기원했다.
하늘은 무심했다. 그의 아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리고 지인도 휴대폰을 닫고 말았다. 신호는 갔지만, 그 신호도 곧 없는 전화번호로 음성안내가 뜨고 말았다. 어딘가로 멀리 떠났는다는 소문만 들었다.
“제가 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지만, 당신이 하는 일은 아주 큰 일이잖아요.”라며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
오늘 유난히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본오뜰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네. 커피 한 잔 어떤가? 만나세.”
순간 얼굴이 부끄러워 휘 살펴본다. 주지 못한 수반으로 한참 동안 눈을 떼질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지인이 옆에 있는 듯 착각 속에 빠진다.
“수반 같은 사람,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담는 그런 당신을 닮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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